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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의 총에 육영수가 사망했나? “의심해보는 까닭”
서울청 경찰이었던 현장감식 책임자 이건우 “양심선언, 왜 묻혔나?”
기사입력  2018/12/24 [16:36]   문일석 발행인

▲ 박정희-육영수(오른쪽) 전 대통령 부부. 1974년 8월15일 육영수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브레이크뉴스 DB사진

 

박정희 집권연장의 음모가 숨어 있었던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광복절 기념식 때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연단에 서서 기념사를 읽고 있었다. 이때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을 든 괴한은 문세광. 박 대통령 뒤에 있던 경호원이 연설대 쪽으로 뛰어나와 총을 발사했다. 이윽고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사이에 단상 위에 앉아 있었던 육영수 여사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총에 맞아 절명한 것.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본 국적을 가진 문세광이가 육영수의 저격범이라고 발표 했다. 나이 22세 문세광. 재일 한국인 2세로 북한으로부터 “박정희를 암살하라”라는 지령을 받고 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 이때의 정부 발표는 현재까지도 흔들림 없이 사실처럼 존재해 왔다.

 

당시 문세광 저격사건은 서울경찰청이 수사를 전담했고, 감식 책임자는 서울청 경찰이었던 이건우 였다. 이건우는 현장을 차분하게 검증을 했다. 그러던 그는 1989년(노태우 정권 시절) “문세광이 육영수를 쏘지 않았다”라는 양심선언을 했지만, 크게 여론화 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역사의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필자는 이건우의 친인척을 알고 있다. 이건우 경찰. 그는 미국 LA로 건너가 살다가 작고했다. 필자가 아는 친인척에 따르면, 그는 치외법권 지역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영향력을 벗어난 상태에서 자유롭게 집필을 했다고 한다. 육영수 암살사건을 상세히 다뤘다는 것. 그는 사건현장(국립극장)을 감식한 경찰이었지만, 한국 정부가 발표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믿진 않았다고 한다. 총알이 뚫고 들어간 ‘탄착점(총성은 7발)’에 육영수 사망의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 총에게 있어, 방아쇠가 당겨진 이후 총구를 벗어난 상태에서 방해물이 없는 한 쏜살같이 직진을 하게 된다. 총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감식 결론. “문세광이 육영수를 쏘지 않았다”. 그는 이와 같이 사실이 아니라고 양심선언을 했지만, 그의 선언은 지금까지 지하에 묻혀있다. 그러나 어딘가에, 그가 죽을 때까지 추구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위키백과는 문세광에 대해 “출생=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 시. 사망=1974년 12월 20일 (2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사인=교수형”이라고 쓰고 있다. 이어 “위조된 여권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였다. 1심 최후진술을 통해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이라고 말한 문세광은 항소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전체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감사하겠다’고 했으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수기를 통해 ‘나는 조국의 하늘 아래 살고싶다 암살목적으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지만 1974년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어 “1974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의 해외동포단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고 돼 있다.

 

2018년 연말. 이건우의 기록. 육영수 사망 이론(異論)이 여론화 되진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지 44년이나 됐다. 문세광, 사건 현장에서 체포됐던 그에 대한 재판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화살처럼 재판이 진행됐다. 사건 후 4개월 5일만인 1974년 12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던 것. 그러나 그가 교수형에 처해진지 5년 후인 1979년 10.26 때 박정희가 암살됐다.


이 사건의 진실은 박정희 정부가 발표한 그대로였을까? 허나, 문세광은 처음엔 목숨을 구걸하진 않았다. 문세광은 1심 최후진술에서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이라 당당히 말했다. 장기집권병에 빠져있었던 말기의 박정희 정권, 박 정권이 발표했던 그 이상의 진실이 있다면, 이제라도 누군가 말할 수 있을까? 이건우, 그리고 그와 함께 문세광 사건의 현장 감식에 참여했던 당시 서울청 경찰들이 침묵을 깨고 진실을 실토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의혹이 '박정희 정권의 적폐'라면 끄집어 내야 한다. 필자가 힘주어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문세광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위해 살인사건의 진실을 왜곡했다면, 국민을 속이는 일이었므로 이제라도 그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집필 후기>이 기사에서 거론되고 있는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발사에 의한 소란스러운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육영수를 사망에 이르르게한 실탄이 문세광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 또다른 저격자가 있었는지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한 입장임을 지적한다.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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